시공의 방랑자들 (3)
3. 격전
모의전이 시작된 지 15분 후, 훈련장 구석에 있는 안전지대에서 시아키는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블루블랙의 땋은 머리 사이로 나온 머리카락이 일부가 살랑이며 흩날렸다. 짙은 남색의 후드형 바람막이, 흰색 언더셔츠와 방탄조끼, 속바지를 덧입은 카고 스타일 미니스커트에 보기에도 튼튼한 군화를 신은 시아키는 왼손에는 디바이스 검을 쥐고, 오른손 손가락을 들어 전장 상황을 브리핑하는 세 개의 화면 사이로 떠오른 검은색 화면을 눌러 들어오는 통신을 받았다.
「 시에, 저 아저씨 말이야,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기세로는 전멸 시키고도 남겠는데. 」
“ 그런 것 같아요, 제 생각보다 많이 빨라요. 그래도 생각보다 성과는 나지 않네요. ”
시아키와 리브, 쿠스케는 각각 지정된 지점에서 시간제한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전투를 시작한 대항군의 기세는 굉장히 맹렬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대항군과 교회군 모두 표시된 체력이 깎였을지언정 어느 쪽도 전사자는 없었다.
“ 쿠스케, 대항군 디바이스 시스템 다운까지 남은 시간은? ”
「 3분 27초. 생각보다 빠르지만 예상 범위 내야. 」
“ 알았어, 2분 후에 타이머창 권한을 이쪽으로 보내줘. 그리고 작전 조금 변경할게. 작전 지역에 진입하면 곧장 플랜C를 실행해. 포격은 재량껏, 좌표는 8, 47, 155. 캐논과의 싱크로 오차는.... +-0.3에서 0.7 사이. 사격이 끝나면 리브 님께 곧바로 합류해. ”
「 알았음. 」
쿠스케의 대답에 시아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항군 팀장이 준비해 온 작전은 간단했다. 단시간에 많은 화력을 쏟아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교회군의 발을 묶고, 포격을 피해 흩어지는 교회군을 포위하여 각개격파하는 작전이었다. 시아키의 예상대로, 대항군은 평소보다 1.5배 마법을 많이 쓰고 있었다.
「 시스템이 다운되는 순간 쿠스케가 후퇴지점에서 L81캐논을 사용한 원거리 포격, 교회군이 포를 잡으려고 나오는 순간 나는 교회군을 제압하고 대장을 구출, 넌 나머지 대항군을 구출, 뒤따라오는 적은 쿠스케가 다시 한 번 포격으로 견제...라. 그야말로 흑표범다운 작전이네.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대항군을 구출하고 퇴각해야하는 우리들도 꽤 빡세겠는걸. 」
“ 그래서 리브 님께 부탁한 거잖아요. ”
「 하핫, 얄미운 녀석. 비행기 태워줘도 소용없다? 」
“ 잔소리는 나중에 하세요. ”
그 사이, 시아키 앞에 놓여있는 타이머는 2분을 가리켰다. 쿠스케와 프람은 관측 장비를 접고 장거리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권총을 만지작거리다 도로 찬 리브 또한 손목과 발목을 풀며 출동을 기다렸다. 시아키는 몇 번이고 이동해야 할 코스를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되짚었다.
「 이거이거.... 이건 좀 심한데. 」
창에 비친 타이머는 1분을 가리켰고, 이제까지 기세 좋게 교전을 벌이던 대항군이 디바이스의 다운을 호소하며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쉬워하며 후퇴를 외치는 대항군 팀장의 얼굴이 창에 들어왔다. 시스템이 다운된 디바이스를 들고 자신의 힘만으로 버티는 대항군이 있는가 하면, 전사자 표시된 대항군을 방패로 삼아 후퇴를 시작하는 이도 있었다. 순식간에 대항군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전사해 버렸다.
「 리브, 지금 간다. 더는 늦어. 」
「 여기는 쿠스케, 충전 개시, 포격까지 15초, 영역 표시합니다. 이탈하세요. 」
“ 시아키, 엔게이지. ”
콰앙!
한 줄기의 포격이 굉음과 함께 그대로 하늘을 갈랐고, 빛은 그대로 시아키와 리브가 서 있는 지점을 지나 대항군이 교전하고 있는 건물 상층에 명중해 큰 충격이 일어났다. 그러자 멀리 있는 장거리 포격 사수를 잡기 위해 두 사람이 나와 저편으로 날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교회군에서 먼저 퇴각을 명령할지, 이쪽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먼저 후퇴할지는 알 수 없었다.
시아키는 지정된 건물의 사이로 진입했다. 그 순간 위에서 하사 계급장을 단 교회군 병사 한 명이 창을 들고 시아키를 향해 뛰어들었다. 바닥이 움푹 패일 정도의 센 공격이 한번, 그 틈을 노린 연타 연계 공격이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점프를 하는 순간 달려든 두 번째 공격은 실드를 펼쳐 받아냈다.
‘ 제법인데. 하지만 너무 정석적이야. ’
교회를 나와 뒷골목을 전전하기를 몇 년,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놈이 바보라는 인식으로 가득한 곳에서의 시련들은 시아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뒷골목에서의 수많은 싸움을 거치면서 터득한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모의전을 치를 때마다 교회 소속 사람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너무 경직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사의 다음 움직임이 너무 뻔히 보였다.
‘ 여기다! ’
상대방이 다시 가로로 창을 휘두르자, 시아키는 재빠르게 검을 거꾸로 쥐고는 휘두르기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베르카식 계열의 충격 마법을 내리꽂았다. 폭발 순간을 예상하지 못한 상대방 하사는 그대로 휘청거렸다.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싸우려 했지만 시아키가 조금 더 빨랐다. 검을 제대로 고쳐 쥔 시아키는 하사가 있는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푸른색 후드 자켓 옷자락과 땋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찰나의 순간이 몇 번, 한 번 두 번 검이 맞부딪치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처음에 어느 정도 버티던 하사는 그대로 무기를 놓쳤고, 먼지투성이 속에서 날아온 발차기에 결국 저편으로 넘어졌다.
「 여기는 리브, B포인트 클리어. 」
“ A포인트도 끝났어요. ”
「 라져. 」
먼지 속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온 시아키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하사로부터 센서의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잠시 후에 안내원의 보호를 받으며 전장을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여기와 저쪽에서 두 명 제압, 빠져 나가야 할 사람은 둘, 이 구역 안에 남은 사람은 다섯이어야 하건만 - 시아키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잠시 후 쿠스케의 두 번째 포격 소리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시아키의 계산과 달리 저쪽도 만만치 않았다. 이쪽의 계획을 꿰뚫어본 것이 틀림없었다. 대항군이 서두르는 틈을 노린 지휘, 전사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지극히 방어적으로 나온 전술, 완벽한 조직력, 거기에 협력자들에 대한 대비까지 완벽했다. 이제까지의 지휘관들은 월등한 실력을 가진 적 한명을 잡기 위해 두세 명을 붙이는 전법을 사용했지만, 이번 부대의 지휘관은 무언가 달랐다. 문 앞에서 자신을 상대하던 하사와의 싸움을 길게 끌었다면 이 하사는 자신을 함정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흩날리는 콘크리트 먼지 냄새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부서진 잔해의 기억은 시아키를 감상에 젖도록 끊임없이 유혹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던 그 날 이후, 시아키는 눈앞의 상황만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했다.
폐허 속을 달리던 시아키의 눈앞에 교회군 한 사람이 지나갔다. 저 사람을 쫓아 하나라도 머릿수를 줄여야 할까? 아니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진행해야 할까? 그를 따라간다면 자신을 몰아서 잡으려는 여럿을 만날 수 있지만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를 것이고, 그를 무시하고 진행한다면 계획했던 대로 적들을 잡을 수 있겠지만 돌발 상황이라도 발생한다면 대처하기가 어려워진다. 시아키는 잠깐 멈췄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그를 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단시간 내에 판단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의 선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 죄송해요, 리브 님. ’
시아키는 교회군을 쫓아가는 척 하며 뒷 허리에 차고 있던 비상용 마력탄 총을 꺼내 교회군이 지나간 곳을 향해 세 발을 쏘고는 자신이 가던 길을 계속 뛰었다. 그 소리에 화답하듯, 아래층에서 리브가 쏜 총에서 나는 익숙한 총성과 저쪽에서 대응하는 마법 소리가 뒤섞인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미 계획을 세울 때, 시아키는 리브에게 처음 지정 구역에 진입하고서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접선할 때까지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사인을 낸 상태였다. 모험을 즐기는 호전적인 성격의 리브가 스스로 미끼가 되는 역할을 즐기기도 했고, 그만큼 상대방은 당황한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쏠려있을 동안 시아키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시아키는 저항군의 위치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두 지점 중 한 곳인 부서진 교회 예배당에 도착했다. 모든 신경을 주변을 흐르는 공기에 집중하며, 왼손에는 검을 쥐고 오른손에는 권총을 들며 조심스레 접근했다. 보이지 않으려 숨죽이고 있었지만 시아키의 날카로운 감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각각에 기둥에 한 명씩,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간 시아키의 눈에 대항군 쪽 전사자를 표시한 노란색 표지석 세 개가 바닥에 널려있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무대 앞에 다다랐다. 들고 있던 검을 오른손에 바꿔 쥐고, 권총을 도로 찼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 ....나와요. ”
부서진 기둥, 흩어져지고 부서진 예배당 의자와 파이프 오르간,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비추는 햇볕, 얼굴이 깨져나간 천사상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 역시 자네였나. 교회의 배신자. ”
묵직하고도 답답한 공기 사이에서, 네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 반가워요. 당신과는 전부터 이야기를 나눴으면 했었어요. 어찌되었건 당신에게는 제대로 설명했으면 했거든요. ”
“ 그래서 일부러 이번 모의전에 자원한 건가? 높으신 분이 뒤에 있다고 이러는가본데, 여기가 지금 아가씨의 놀이터로 보이나? 우리로서는 1년에 한번 잡기도 힘든 모의전이란 말이다. ”
소령 계급장을 단 무리의 우두머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철컥 하는 디바이스의 마찰음이 제법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 작작 좀 해! ”
쩌렁쩌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예배당 안을 뒤흔들었다.
“ 예비교 과정에서 넌 유망한 시스터였더군. 게다가 뒷소문에 있었던 베버들린 대주교의 사생아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고. 공전 능력도 제법 있어서 기사 후보가 될 정도로 자질도 뛰어나 그대로만 갔다면 앞길은 탄탄대로였을 거야. 그런 네가 양심이 있었다면, 성왕 앞에서 가책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베버들린 스캔들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해서든 졌어야 했어. 그렇지만 넌 거기에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살인마를 비호하고 도망쳐 어둡고 더러운 뒷골목으로 숨어들었지. 그리고는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지. 3년 전, 너는 중요 참고인을 추적하는 우리들을 가로막았어. 우리는 그 작전을 실패했고, 너희는 그 녀석을 도주시켜 잠재적이지만 세상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런 네가, 한평생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속죄해도 모자랄 판인데 무슨 낯짝으로 교회로 다시 돌아온 거지? 교회경 제 15권 32절, ‘ 집 나간 탕아가 돌아올 적 나는 그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고.... ’ 그래서 교회로 돌아온 흑표범은 면죄부를 얻기 위해 높으신 분들의 개가 되었는가? ”
“ 그때의 일이라면 당신은 그 사람을 쫓고 있었을 것이고, 나는 의뢰를 받아 일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소령님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받은 의뢰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어른들의 거친 추적을 피해 다른 세계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
“ 그런데 그 일은 보수가 꽤 많았다고 안다. 보수는 뒷골목에 꽤 잘나가는 양반께서 지불하셨더군. 돈이 목적이었나? 전도유망한 시스터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가 있지? ”
“ 타락이라고요?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닌데 전투 기인으로 태어난 아무 죄 없는 시스터 한 명을 갱생의 기회조차 없이 위험하다는 낙인을 찍어 제거하려 했던 것과, 범죄자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죄 없는 아이를 사살하려 한 당신들의 독선적인 행동이야말로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온 세상에 평화’ 위한 행동인가요? ”
“ 그것이 온 세계를 위협한다면, 없어져야 할 것은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이다. 네가 살려 보낸 단 두 명의 사람이 나중에 열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어. ”
“ 하지만 모두의 평화를 위해 그 두 명의 살아갈 권리를 빼앗으라는 이야기는 경전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
“ 그럼 이 위협을 그대로 두란 말인가?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게. 테러공격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네 앞에 어떤 소녀가 테러를 저지르려 하고 있어. 그 옆에서 누군가가 그 애들은 어리니까 봐주자, 아직 아무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놔두자 같은 소리를 해도 자네는 가만히 있어야겠구만. 성왕교회가 왜 치안유지 업무까지 담당하는지 아나? 그런 걸 막자는 것일세. 유감스럽게도 베버들린 스캔들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그런데 그 딸은 반성은커녕 번번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지. 아마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에는 많을 거야. 그러니까 수도원에서 가족의 죄를 참회할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거나 이만 교회를 나가주게. 쿠스케랬던가? 신의 길을 거스른 당신은 교회의 이단자고, 그 녀석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교회 전체는 물론이고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이미 위험분자니까. ”
가슴을 찔러오는 남자의 한마디 말 한마디 말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답을 얻기 위해 교회를 나왔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답을 찾는 것도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자신만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 이 사람을 만나고자 했던 것도, 조금이라도 그 답에 다가서기 위한 시아키의 의지였다. 시아키는 크게 숨을 골랐다.
“ 소령님, 한때의 저 또한 당신처럼 굳건한 믿음으로 한평생 신의 길을 걷게 될 거라고 믿었었습니다. 제가 믿었던 아버지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베버들린 대주교님이셨고, 저는 TV화면에서나 볼 수 있던 그런 아버지를 마냥 좋아했어요. 그래서 기사 자격을 얻고, 언젠가 그 높은 곳에 나란히 서면 아버지가 절 인정해 주실 거고, 성왕의 충실한 종이며 교회의 수호자, 나아가 성왕께서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이들을 위해 한평생 살아가기를 바랐었지요. 그 때의 저는 너무나 어리고 미숙해서 그저 앞만 보고 달렸었어요. 쿠스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줄 몰랐죠.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날 밤, 처음으로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성왕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제 주변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순간까지도 날 받아주시지 않으셨고, 사람들은 저를 범죄자의 아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위해 시간을 버는 장기 말에 불과했던 전투기인 쿠스케도 그 길로 사라졌었지요. 그렇지만 쿠스케는 그때 전투기인 상태였던 쿠스케로부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과 실낱같은 희망을 내게 남겨줬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저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 상태에서도 살기 위해 저렇게 애쓰는 쿠스케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제게 교회의 이름으로 무기를 들이댄 것은 당신들이었고, 저는 그 길로 교회를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나와서 지내기를 4년이었어요. 밖에 나와서 지내면서 듣고 보고 지낸 그동안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어요. 저는 더 이상 아버지와 저와 쿠스케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당신들을 증오하지도 않고, 적대 할 이유도 없어요. 그렇다고 신의 길과 어둠의 영역, 그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저와 쿠스케의 기분을 알아달라고 무작정 조르지는 않겠어요. 쿠스케는 지금도 독한 진정제를 먹어가며 자기 안에 있는 살인 프로그램을 다스리기 위해 고통스럽게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그 노력을 옆에서 도와주고 싶어요. 당신들에게 증오는 받을지언정 해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성왕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시련을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속죄하기 위해 저희가 교회로 돌아왔다는 그 사실만은 알아주세요. ”
“ 변명은 끝났나? ...”
“ .... ”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 내가 만약 여기서 자네를 사살해도 모의전이기 때문에 자넨 죽지 않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나와 여기 있는 내 부하들은 그 때의 일로 여러모로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이라서 말이야. 내가 생각을 바꾼다 해도 여기 있는 내 부하들의 생각까지 내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네. 그렇다면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
“ 저는 저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소령님이나 소령님의 부하 분들 또한 자신의 길을 걸으시면 됩니다. 언젠가 그 길이 만났을 때, 그때는 당신과 즐겁게 대화하는 날이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
“ 그렇군.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네. ”
“ 감사합니다. 그럼. ”
그렇게 대화를 끝마친 시아키는 왼손으로 칼집을 쥐고, 조심스레 발도술 자세를 취했다.
잠시 후 요란한 총소리와 폭탄소리가 예배당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