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경계에 있었다. (1)
시공의 방랑자들 - 그들은 경계에 있었다.
217호 병실 건너편에 걸려있는 벽시계는 밤 10시를 가리켰다.
면회가 끝나 소등시간이 된 병원은 당직을 서는 병원 간호사나 순찰을 도는 경비들의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고요함을 유지한 채 오늘도 어두컴컴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소등시간이 되자마자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오늘 있었던 재활운동이 생각보다 과했던 모양이었다. 무릎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통각에 슬며시 진통제의 유혹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시아키는 조용히 그 통증을 견디며, 왼손에 걸린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머리맡을 천천히 들어 올려 자리에 앉았다. 약간의 움직임이었음에도 괴로운 듯 잠깐 심호흡을 했다. 쿠스케가 선반에 갖다놓은 사제 스탠드에 불을 켤까도 생각했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대신 살짝 열어둔 창문 너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침 검진 후 재활운동, 그리고 휴식으로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기 시작한 지 벌써 3개월째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본의 아닌 휴가였고, 그 휴식이 가져다주는 달콤함과 씁쓸함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나날이었다. 이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손님마다 과분할 정도로 사식을 들고 오는 바람에 도리어 체중이 늘어날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왁자지껄한 손님들이 가고 나면 그동안 하고 싶었던 분야의 서적이며 신문과 잡지, 만화책까지 두루 읽었고, 그것이 지루해지면 목발을 짚고 프람과 함께 가볍게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도로를 밝혀주는 가로등의 불빛과 병원으로 들어오는 차의 헤드라이트 빛이 눈이 들어왔다. 두 다리 멀쩡한 씩씩한 쿠스케와 프람이라면 걸어서 5분이었지, 2층 창문에서 본 저쪽 정문 초소까지는 정말 가깝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공중에 떠서 간다면 모를까, 차가운 철제 휠체어나 목발에 의지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시아키는 씁쓸해하며 다시 잠들기 위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뜬 시아키의 경계 어린 보랏빛 시선은 약간의 빛을 머금은 채 병실의 문을 향했다. 베개 속에 숨겨둔 사제 마력탄총을 찾아 조심스레 쥐었다. 조심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아직 일어나 있었나? ”
“ 자다가 깬 거야.... 공방은? ”
“ 제대로 닫고 왔다. ”
시아키는 속으로 안심하며 총을 쥔 손에서 자연스럽게 힘을 뺐다. 리모컨을 들어 소형 전등에 불을 켰다.
“ 오늘은 안 와도 된다고 했잖아. 쿠스케는? ”
“ 공방 문 닫고 피곤해서 바로 잠들었다. 지금은 깊이 가라앉아 있다. ”
“ 그래.... ”
자연스러운 갈색 단발이 살랑거리는 바람에 휘날렸다. 그 간지러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 듯 그는 창가로 다가가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창문을 닫았다. 평소와 달리 그는 안경을 쓰지 않았고, 왼쪽 눈이 간간히 붉은 빛이 깜빡거렸다.
“ 열 센서 감지 결과 전체적으로 미열이 확인되었다. ”
“ 괜찮아. 약을 써야 할 정도는 아니야. ”
“ 카운터에 가서 해열제를 달라고 하겠다. 통증이 심하면 진통제도 같이 가져오겠다. ”
“ 아일렌. ”
“ 왜 일부러 고통을 견디는 거지? 네가 잠을 잘 못자는 것이 열과 통증이 원인이라면, 그걸 없애버리면 된다. 안 그런가?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일렌은 되물었다.
“ 사람은 말이야, 기계랑 달리 자꾸 아프다고 약을 쓰면 정작 나중에 필요할 때 약이 잘 안 듣게 돼.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예를 들어, 네가 완벽하게 기능을 하는데 총 100의 리소스가 필요한데, 어떤 식으로든 의식을 유지하는데 최소한으로 필요한 리소스는 60이라고 하자고. 반대로 말하면, 나머지 40의 리소스는 네가 악성코드에 감염되거나 리소스 안에 불량섹터가 발생해서 못쓰게 되더라도 전투라면 모를까 네가 완벽한 상태로 나와 대화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야. 그런데 이 리소스 100에 틈만 나면 어떤 바이러스가 침입해 리소스를 차근차근 감염시키는 거야. 1부터 시작해서 2, 3.... 그 악성코드를 제거하려면 백신이 필요한데, 그 백신은 유일하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사용할수록 바이러스도 그에 따라 대처법을 찾아낸다고 해. 처음에 몇 번은 괜찮지만 나중에는 한번 써도 될 것을 두 번 세 번을 써도 듣지 않고 나중에는 전혀 소용이 없게 되는 거지. 그럼 넌 어떻게 할래? 단, 그런 백신은 백신이 아니라거나 그런 바이러스는 없다는 답은 안 돼. ”
“ .......내가 계산한 바로는 감염된 리소스 수치가 35에서 40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백신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낮은 수치에서 사용하던 높은 수치에서 사용하던 사용하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른 완벽한 백신을 완성시켜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하겠다. 아닌가? ”
“ 으음, 좀 많이 나간 것 같지만... 정답.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덧붙이면 난 지금은 최소한의 수치가 되지 않은 상태니까. 수치로 따지면 한 25 정도 왔을까. 그러니까 괜찮아. ”
“ 그런가. 내가 보기에는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쿠스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지? ”
“ 글쎄, 견딜 수 있겠다 싶으면 가만히 있을 거고, 내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라면 어떻게든 약을 먹였거나. 걔라면 일단 약을 먹이고 싶어 하겠지만, 내가 걔 마음을 알 수는 없으니까 잘은 모르겠어. ”
“ 그렇군. 참고하겠다. ”
“ 그거 다행이네. 그리고 열 센서를 쓰는 건 자유지만 사람을 그렇게 아래위로 훑어보는 건 하지 마. 어디 가서 그러면 괜히 오해를 사니까. ”
시아키가 보기에 지극히 기계의 사고를 가진 쿠스케 속의 또 다른 인격, 이른바 ‘코드 아일렌’은 인간식의 사고 정립이 아직 덜 된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주변을 곤란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쿠스케는 그것을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0과1의 조합에서 나타나는 컴퓨터식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시아키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쿠스케도 자신과 몸을 공유하는 아일렌에게 나름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 같았지만 시아키 또한 아일렌의 이 이분법적 사고가 학습으로 얼마나 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짝 호기심을 갖고 있던 상태였다. 평소에는 사이가 껄끄러운 편이었어도, 시아키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일렌에게 이런 식으로 인간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법을 가르쳤고 아일렌도 그걸 마다하지는 않았다. 아일렌과의 대화는 시아키의 그런 흥미를 제법 충족시켜 준다.
“ 하지만 지금은 진통제를 먹기를 권한다. 갑작스럽지만 빠르면 20분 안으로 우리를 찾아올 손님이 있을 것 같다. 조금 전에 병원장이 수석 간호사를 통해 늦은 시간이지만 지금 바로 면회가 가능한지 물어봤다. ”
“ 면회? 지금은 면회시간이 아닌데. 누구한테서? ”
“ 수석 간호사는 성왕교회 사람이라고 했다. 프람이 밖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
“ 교회사람이라.... 혹시 모르니까 병원장의 통신 내역을 뽑아볼까. ”
“ 알았다. ”
선반에 있던 진통제에 손을 뻗은 시아키가 보기에도 쓴맛이 느껴지는 흰 색 알약 두 알과 물을 입에 넣고 삼키는 동안 아일렌은 시아키의 침대 옆에 있던 통신 단자에 자신의 단말기를 전선으로 연결하고는 창을 하나 열었다. 방화벽을 무척 쉽게 뚫어내는 아일렌에게서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은색 창이 하나 열리고 녹색 글자가 주르륵 표시되었다. 곧 창이 닫히고 병원장이 쓰는 일반적인 통신창이 떴다. 필요한 내용을 찾은 아일렌은 그것을 시아키 앞의 화면으로 넘겼다. 뒷세계에서 지내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난 그들에게 해킹은 뒷골목에서의 경험부족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한 여러 수단들 중 하나였다.
“ 메일 쪽은 별다른 내용이 없지만, 통신 내역 중에 교회 쪽에서 나온 주소가 하나 있다. 발신 시간은 17시 38분, 발신인은 이 지역의 원로 교구 신부다. 단순한 통화내역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면회 요청을 가장한 정찰 패턴으로 추정된다. ”
“ 글쎄, 내가 만약 저쪽의 현장책임자라면 이런 접촉보다는 신속하고 조용하게 각개격파를 하거나, 내가 네 발목을 잡고 있는 지금 바로 치고 들어올 거야. 급한 건 저쪽이니까. 그랬다면 공방은 이미 엉망이 되고 지금쯤 병력들이 이 주변을 포위했겠지. 안 그래? ”
시아키는 아일렌을 제지하며 손가락으로 왼쪽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 이 사람, 만나볼게. 만약에 경우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