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작업물/E.H.

[ E.H ] 비에타

Karierka 2014. 8. 4. 23:26

먼 옛날에, 바슬란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 ....그리하여 용사는 베디사 신의 가호 아래에서 공주님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인형극이 끝나 주변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박수를 친 후 하나 둘 자리를 뜨면, 오늘의 공연 이야기를 꼭두각시 인형에 달아 풀어냈던 인형술사는 옆에서 자신을 보조해 준 피부 검은 남자 조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인형술사가 무대 주변에 놓은 모자에 들어온 금화를 살펴보는 동안 조수는 이야기에 썼던 인형을 가방에 집어넣는다. 펼쳐놓았던 무대를 차곡차곡 접어 짐을 꾸리면 그들의 오늘 일은 끝이 난다.

 

한 달 전부터 바슬란 대성당 부근에 자리를 잡고 인형극을 공연하는 그 인형술사 여자는 그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선보이는 인형극은 흔한 장사 밑천이 아니었기에 한번쯤 이곳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곤 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은 발길을 돌린다. 공주와 모험가 왕자, 공주를 노리는 험상궂은 마녀와 마녀의 충실한 괴물, 그리고 왕자의 조력자이자 바슬란의 수호신인 여신 베디사의 역할을 맡은 꼭두각시 인형들이 만들어낸 조잡한 길거리 연극이었다. 몇 분만 살펴봐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유치한 연극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무로 만든 뼈대에 헝겊 옷을 만들어 입힌 꼭두각시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은 인형술사의 연기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무대 앞에 불러 세우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은 용감한 용사님이 공주님을 구해내는 해피엔딩 연극에 빠져들었고, 인형술사는 그런 아이들의 부모를 상대로 돈을 벌었다. 가격이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내키면 앞에 놓여있는 낡은 모자에 동전 일부를 집어넣으면 그만이었다. 아이를 잘 맡아줘서 고맙다며 돈을 넣는 사람도 있었고, 초라한 행색의 여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쳐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인형술사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자는 술을 사먹거나 낡은 여관에서 자는,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았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술을 마시기 위해 찾아들어간 술집에서 자신에게 덤벼든 험상궂은 건달 몇 명을 두꺼운 팔뚝과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남자 조수와 함께 때려눕혔다는 사실이 결정적이었다.

당신은... ”

 그런 인형술사에게, 하루는 연극을 보던 한 소녀의 아버지가 술을 산 적이 있었다. 근처 낡은 대폿집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사내들 틈새에서, 저편 구석에서 조용히 술에 물을 타서 마시고 있던 인형술사 여자를 알아본 소녀의 아버지는 보기에도 더워보이는 털옷을 걸친 이 이방인 인형술사에게 쭈뼛쭈뼛 말을 걸었다.

아아, 이거.... 미안하게 됐소이다. 낮에 우리 딸이 당신네 인형극에 푹 빠져 있었거든. 그때는 내가 가진 돈이 없어서....어떻게 여기서 다시 만났구려. ”

그렇게 미안할 것까지야.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건 아니거든. ”

여자는 독특한 억양으로 대답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술 한 잔 사리다. 괜찮다면 아까 옆에 있던 조수 분 것도 같이 사고 싶은데. ”

돈이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

마침 오늘 일당 탄 게 있거든. 어떻소? ”

남자의 말에 여자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남자를 올려보았다. 흰색 깃이 힐끗 보이는 셔츠에 허름한 재킷을 입고,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길렀다. 그런 데다 말투가 제법 거칠다. 이 근처 빈민가에 사는 이름 없는 서민인 듯 했다.

여기서 술 마실 시간에 딸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라고 하면.... 아아, 괜한 참견이겠지. 그 아이, 당신 참 좋아하던 것 같던데. ”

나도 우리 딸 참 사랑하지만, 그 딸이 집에 돌아오면서 묻더이다. 다른 사람들은 동전을 넣는데 왜 우리는 그냥 가냐고. 그 애비가 되어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상대로 무전취식하는 걸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소. ”

그리 말씀하신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지. ”

생각보다 세게 나온 남자의 말에 여자는 결국 수긍했다. 여자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는 자연스럽게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조수는? ”

잠시 나갔으니까, 알아서 오겠지. 그보다도 아저씨, 술을 살 거면 나보다는 이 녀석 걸 좀 사 줘. 술을 먹일 수는 없거든. ”

그리고는 탁자를 검지로 가리켰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탁자 밑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발밑에서 노란 눈동자를 가진 검은 개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가 흔들렸다. 잠시 후에 남자는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허리를 펴고는 여자의 탁자를 바라보았다. 고기가 놓여 있음직 한 접시는 비었고, 여자는 물을 탄 술만 마시고 있었다. 남자는 혀를 한번 쯧 차더니 카운터에 가서 새로 술과 음식을 받고 값을 치렀다. 종업원이 따로 없는 곳이어서 스스로 가져와야 했다. 여자는 접시에 있는 닭다리를 덥석 집어 뜯더니 그것을 탁자 아래로 밀어 넣었다.

보아하니 이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멀리서 오셨소? 바슬란? 세이몬? 아니면 하바로니아? ”

“ ...... ”

, 궁금해서. 이 동네에서 장사하는 시전상인 하나가 하바로니아에서 왔다는데, 그 사람 가게가 우리 거래처거든. 좀 허풍쟁이인데, 자기 말로는 바다를 두 번 건넜다고 하지만 어디서 듣기로는 한번만 건너도 된다고 하더이다. 아주 먼데서 왔다면 그쪽 정도 될까... 근데 당신은 그쪽은 아닌 것 같소만. 그 사람은 피부도 까무잡잡한데다, 그 지저분한 수염을 잔뜩 길렀으니까. ”

자신의 술을 쭈욱 들이키며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 얘기해줘도 모를 텐데. ...굳이 이야기하자면 베렌에서 왔거든. ”

...? 세이몬에 있는 어느 시골 촌동네인가? ”

거봐. ”

여자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바다 건너 이스리안에 비하면 촌동네 맞지. 정확히는 바다건너 이스리안에서도 북서쪽으로 몇 천 리를 더 가야 하는 곳이야. 광물이랑 나무는 많이 나는데 요즘 시기에는 눈도 무릎까지 쌓여서 사람들은 개썰매를 타고 다니고, 별 생각 없이 나가면 몇 시간 만에 얼어 죽을 정도로 정말 춥고 험한 곳이야. 나는 거기에서 바이튼, 바이튼에서 배를 타고 세이몬... 엘라드리움.... 엘라드리움에서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온 거고. ”

저 인형세트만 달랑 메고? ”

그럼. ”

여자는 살짝 풀린 눈으로 술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에이, 뻥치지 마시오. 시내에서 조금만 나가도 산적 떼들이 득실거리는데 어떻게 당신 같은 여자가 그 먼 길을 올 수 있단 말이오? ”

, 이해 못하는 당신을 위해 굳이 가르쳐 주자면, 당신이 아까 말한 하바로니아 사람들 있지? 그 사람들은 말이야, 밀 한 톨 못 키우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고, 할 수 있다면 그 얼어 죽을 베렌이고 엘라드리움이고 어디든 세상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거든. 난 그런 사람들 틈에 껴서 말발굽이나 자물쇠 같은 거 고쳐주고 소일하면서 따라왔어. 이래보여도 나름 고장 난 물건 고치는 재주는 좀 있거든. ”

헤에.... ”

난 원래 베렌에서 하바로니아 상인들이 사가는 고급 나무인형을 만들던 장인이었어. 그런데 공방 장인이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공방이 쫄딱 망해버려서 길거리에 나앉게 된 거고. 그래도 한 겨울에 얼어 죽기 싫어서 입에 풀칠은 해야겠고, 하다 보니 하바로니아인 상단을 따라 국경을 넘었다 이거야. , 이래저래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저기서 꼭두각시 인형으로 밥벌어먹고 있더라고. ”

.....그래도 당신 정도 장인이라면 어디서든 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소만. ”

사실 여자의 인형극에 그의 딸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눈을 떼지 못하고 인형극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할 수 없어 끝까지 기다렸던 게 여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도 하지 못한 터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재우고 나와 대폿집에 들어선 순간 그 여자가 보였다. 남자들이 내뱉는 여자에 대한 온갖 음담패설이 시끄럽게 뒤섞인 술집에서,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홀로 술을 마시는 간 큰 여자는 흔하지 않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보고 호기심이 일었고, 그렇게 먼저 접근했다. 빚을 갚을 겸 해서 술 한 잔 사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얻어들으며 집에 갈 때까지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그런데 술이 조금 들어간 탓인지 의외로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던 것이었다. 이쯤 되자 남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생의 지기로 여겼던 이에게 사기당하고 하류층으로 전락한 자신만큼이나 비참한 떠돌이 삶을 산 이 여자를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었다.

그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어디 있는 건 별로. 딱히 정착할 생각도 없고. , 살짝 얘기하면... 내일 여길 떠날 생각이야. 오늘 밤이면 여기 일도 다 끝나니까, 두 번 다시 당신을 볼 일도 없겠지. ”

? 어디로? ”

글쎄... 테라센에라도 가볼까. 거기서 밥장사 하는 오랜 지인이 거기 있거든. 근데 아저씨, 날 불쌍하다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밥 굶고 여기저기서 굴러다녀도 난 내 처지가 딱히 누구에가 위로받을 일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 없으니까 너무 심각하게 신경 쓰지는 마, ”

나보다 나이도 젊은 것 같은 사람이, 신도 아닌데 너무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얘기하는 거 같소이다. 그렇게 고생한 사람들의 소원은 소박하잖소. 더군다나 여자라면... 지금은 자기 처지가 그래도 어디 정착해서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는 걸 많이들 생각하지 않소. ”

“ ....그런가?...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그거. ”

아차..... ”

남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 ....재미있는 사람이군, 당신. ”

돌아오는 대답에 여자는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했다. 고개를 거칠게 좌우로 흔든 남자는 횡설수설하며 자기 앞에 있던 술을 쭉 쭉 들이켰다.

좋아, 기분이다. 좋은 걸 좀 줄게. 당신 옆에 보면 가방 있지? 그거 좀 집어주겠어? ”

이거 말이오? ”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여자는 음식 접시를 한쪽으로 치운 다음 남자에게 손짓을 했다. 남자는 자신의 옆에 있는 딱딱한 상자 가방을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잠금장치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남자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그냥 이 동네에 버리고 갈까 했었는데, 당신 줄게. 딸에게 가져다줘. 나한테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

당신, 그거.... ”

오래 전에.... 헤어졌던 남자가 있었어. ”

놀란 남자의 말을 가로막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좋아했고, 내 마음을 다 줘도 좋았을 만큼 사랑했던 남자였어....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이루어지진 못했었지. 나중에 들으니까 그 사람은 다른 여자랑 결혼했다더라고. 그 사람의 자식들이 여기에 살아. 참 애꿎은 일이야.... 오늘이 그 사람 기일인데, 다들 오늘 밤에 죽을 거거든. ”

? ”

눈을 한번 찡그린 남자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술 잘 마셨어. 지금 바로 집에 들어가. 그리고 오늘 밤에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 궁금하다고 나와서 구경하다간 당신이나 당신 딸이나 큰일에 휘말릴 테니까. ”

저기 잠깐... 그게 무슨 말이오? ”

곧 알게 될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걸. ”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아있던 개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이미 여자의 앞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자는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여자의 옷소매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술을 다 마신 인형술사 여자는 그길로 개를 앞세워 대폿집을 나갔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직 남아있던 남자는 여자가 자신이 아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대로 여자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 막다른 골목에는 여자는 물론, 그녀를 따라다니던 개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시끄러운 말울음 소리와 동시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무언가가 타는 냄새가 났다. 남자는 큰길가를 향해 돌아보았다. 신정국가 바슬란의 경비를 담당하는 교회 소속 기사단 다수가 보기에도 섬뜩한 무기들을 잔뜩 들고는 말을 타고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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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유베리스 세계의 열두 신, 그리고 베렌에서 온 여자는 그들 중의 한명인 '장인과 대장장이, 도구의 여신' 라세일린. 오래 전에 사랑했던 인간계 인간 남성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대신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손녀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손녀가 생명의 신 카이토스의 명부에 의하면 젊은 나이에 죽게 되어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