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작업물/E.H.

[E.H] 라일의 여관이야기 (BL주의? )

Karierka 2014. 8. 4.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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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구름이 가려진 어느 늦은 밤이었다.

불을 붙인 촛대를 들고서 여관을 한 바퀴 돈 라일이 계단을 통해 1층에 있는 로비로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그에 맞춰 괘종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키며 종소리를 냈다.

벽에 걸려있는 손때 묻은 괘종시계는 이 여관과 인연이 있는 전 주인들이 아낀 물건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소리는 이스리안의 바이튼 왕성에 있는 오래된 시계에서 나는 것과 매우 흡사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아닌, 오랜 세월을 거쳐 낡고 닳아서 생긴 부드럽고도 은은한 쇳소리였다. 그렇기에 들을 때마다 기분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현 베렌 대공 카리에르카 아델트 크로프라우젠과 여러모로 인연이 있는, 베렌의 유일한 마창단을 이끌고 있는 늙은 단장 소유의 이름 없는 소규모 여관이었다. 여관이라는 이름을 걸긴 했지만, 단장이 마창단 일 외에는 문외한이었던 데다 마창대회 시즌이 되면 경기를 치르기 위해 바이튼으로 떠나 몇 달 동안 이곳을 비우기 때문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가끔 대공의 남동생이자 라일의 연인인 타리크가 단장의 안부를 묻기 위해 방문하다 급한 대로 식당일을 도울 정도고, 간혹 손님이 있다고 해도 잠을 자기에만 충분할 뿐 식사 대접은 제대로 받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말만 여관이었지 운영은 형편없었다.

 왕좌에서 내려와 도망치듯 바이튼을 떠나고, 왕실의 별장에 반 유폐되다시피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베렌에 오게 된 라일이 타리크와 함께 이 여관을 찾았을 때, 그는 낡고 손때 묻은 세간들이 많았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이곳에 여러모로 관심을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베렌 대공의 호의로 얼마든지 대공 관저에서 지낼 수 있었음에도, 라일은 주저 없이 이 여관에서 일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시종들이 수십 명 따라다니던 국왕이었지만 아침 청소며 빨래, 심부름과 정리정돈 같은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국왕이 되기 전의 아버지와 함께 유베린 교단에 소속된 자그마한 신전에서 매일 했던 일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어느 정도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관저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단장 주변의 일부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라일이 단장의 여관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라일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에는 위험하다며 반대하던 카리에르카 대공도, 누추한 곳이라며 극구 사양하던 마창단 단장도 라일의 설득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관저를 떠나는 라일이 걱정이 되었는지 타리크도 같이 나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런데 일은 뜻밖의 상황으로 흘렀다. 반년 동안 일을 배우며 나름 조수 역할을 잘 해내는 라일을 보며 흡족해하던 단장이 라일과 타리크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한 달 후에 그대로 세상을 등진 것이었다. 어머니인 티샤에서부터 단장과 깊은 인연이 있던 카리에르카는 대공 차원에서 단장의 가족을 수소문 했지만, 먼저 죽은 외아들 내외가 있었을 뿐 도저히 다른 가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단장이 죽기 직전에 여관의 처분을 다른 누구도 아닌 마창단의 후원자인 카리에르카에게 맡기겠다는 의사표시를 했었기 때문에, 카리에르카가 여관에 대한 처분을 정할 때까지 라일이 이곳을 맡아 관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라일은 이 여관의 관리자가 됐다.

 

일 자체는 재미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카일로 시내에 묵을 곳을 찾다 그의 여관을 찾았다. 일을 하러 간다며 떠난 남편을 찾아 이곳 카일로에까지 찾아온 가난한 여인과 두 자식들도 있었고, 베렌에 새로운 거래를 트기 위해 찾아온 젊은 하바로니아 상인도 있었으며, 애인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중인 모 나라의 귀족도 있었다. 그 밖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보고 듣는 여러 이야기는 이제껏 자신이 왕성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도 있었고, 정 반대의 것도 있었다. 그 차이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라일은 즐거웠다. 더군다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학교 동기인 타리크가 여관의 식사를 관리하며 이곳에 항시 머물고 있고, 왕성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었던 하바로니아 출신의 시아키도 대공 관저에서 매일 아침 이곳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관저에서 지내며 수업을 받는 이복동생인 시츠도 일과가 끝나면 자신을 만나러 자주 찾아왔다. 그러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완벽했다. 언제까지고 이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조금 천천히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 라일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2-

 

저기... 혹시 방 있습니까? ”

몇 분이세요? ”

여섯 명입니다만. ”

그런 라일의 여관에 조금 전, 괘종시계가 만들어놓은 묘한 분위기를 깨는 재미있는 손님들이 들었다.

영업을 마감하려는 꽤 늦은 시간에 맞은 그 손님들은 네 사람의 남자 손님과 두 사람의 여자 손님이었다. 아름답다 싶을 정도로 맑은 청록색 눈빛과 금발, 고급 원단으로 만든 코트와 수트가 균형 잡힌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이 인상적인 남자가 여관에 들어섰을 때, 라일은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제법 신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뒤로 경호원으로 보이는 활을 찬 남자는 베렌의 날씨가 추운 건 여행자의 여신이자 신계의 장인인 라세일린 여신이 자신의 대장간에서 그녀의 수호수인 프라곤과 말다툼을 벌이다 홧김에 자신의 대장간을 지피던 불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고, 그 불이 하필 베렌을 따뜻하게 하던 온기였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라세일린이 실제로 들었다면 호탕하게 코웃음 칠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드는 남자를 향해 그 옆에 있던 조금 어린 남자는 곤란한 듯 자꾸 눈치를 주었다. 각자 자신들의 가방을 든 두 명의 여자 손님이 안으로 무사히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들어선 키 큰 남자는 맨 처음에 이곳으로 들어와 방이 있는지 물었던 남자였다. 그는 보기에도 무겁고 폭이 큰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문득 호기심이 생긴 라일은 무기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을 용병 출신인 시아키나 직업상 다양한 무기를 접해온 해군 출신 이베이라 대장에게 물으면 자신에게 밝히게 될 공식적인 신분 외에 이 사람들에 대해 무언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마부들에게 물어보니 이 시간에 방이 있을 만한 곳이 이곳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

, 괜찮습니다. 이 일이 원래 밤낮이 없어서요. 그래야 저희도 먹고 살거든요. .... 죄송한데 신분증 좀 잠깐 보여주시겠어요? 아니면 국경 초소 스탬프가 있는 증명서라도 괜찮습니다만. ”

금발의 남자는 독특한 억양으로 라일에게 사과했고, 손을 내저은 라일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 화답했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내용이 인쇄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방의 배정과 식사 여부 등을 적을 주문서였다. 이전의 주먹구구식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 라일이 나름 고안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낡은 여관인데도 법을 지키는 곳이 있었네요. ”

마음에 안 드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어, 이든. ”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

참아. 이 시간에 노숙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 ”

묵을 여관에 숙박카드를 쓰거나 신분증을 보이는 것이 각 국가별로 법으로 정해져 있었긴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법이 사문화 된지는 오래였다. 어린 남자가 그걸 지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신분증 검사는 법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라일 자신의 신변 안전까지 보장받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여기에 거부감을 보인다면 그 손님은 받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뒤쪽에서 시끄러워진 일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발의 남자는 수트의 안쪽 주머니에서 세이몬과 이스리안, 베렌 국경의 스탬프가 찍혀있는 수첩을 꺼내 라일에게 보여주었다.

아하하,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규정이거든요..... 고맙습니다, 쥬벨님. 저는 라일 메슈프렌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제가 여기에 없으면 여기에 있는 벨을 누르시거나 저쪽에 있는 방문을 두드려 주시면 저나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도와드릴 거예요. 방은 어떻게 드릴까요? 마침 오늘은 모든 방이 다 비어있어서 아무 방이나 쓰실 수 있어요. ”

수첩을 돌려준 라일은 그들의 주문 사항을 적기 위해 펜을 들었다.

어떤 방으로 할지는 저희가 보고 결정하죠. ”

알겠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침식사는 오전 8시인데, 방으로 가져다 드릴수도 있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실 수 있어요. 요금에 따로 차이는 없어요. 아침식사는 주로 베렌식이고, 따로 요금을 더 내시면 만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특별히 주문도 가능하세요. 만약에 식사를 안 하시겠다 하시면 식대는 숙박비에서 따로 빼드리고요. ”

근처에 아는 식당이 없으니 일단 아침은 여기서 먹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특별히 일정도 없고, 여기 있는 일행들도 피곤하니까 식사는 내일 아침 9시 정도에 식당에 해 주셨으면 하는데 가능한가요? 메뉴는 상관없습니다. ”

알겠습니다. 체크아웃은 오전 11시가 규칙이지만 식사 시간이 늦어지니까 특별히 한 시간 뒤로 미뤄드릴게요. 그리고 지금 날씨가 좀 쌀쌀하니까 이불을 조금 더 넣어드릴게요. 숙박비는 선불이고요, 확인 서명 부탁드려요. ”

라일이 금발의 남자에게 내민 종이에는 각 항목별 요금과 방금 적은 내용들이 깔끔한 공용어 글자로 쭉 적혀있었다. 남자는 라일이 책정한 숙박비 내역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서류에 서명을 했다.

근데 마스터, 보통 여관이라고 하면 장사하는 곳이라 간판도 크게 달고 해서 눈에 잘 띠게 하는 게 게 보통인데 여기는 정 반대네요. ”

제드로. ”

일행으로부터 숙박비를 받아 세고 있던 라일에게 활을 찬 남자가 말을 걸었다. 옆에 있는 큰 칼을 찬 남자가 그를 제지했다. 질문이 상당히 날카로웠지만 특별히 악의는 없는 것으로 보였기에 라일은 제드로라 불린 남자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 간단히 말씀드리면 여기를 물려주신 전 주인께서 버리지 못한 물건이 많거든요. ”

전 주인이요? ”

금발의 남자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 원래 여기는 전 마스터의 아들 내외분이 하숙집으로 운영하시던 곳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 부부 일가족이 바슬란으로 가족 여행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돌아가셨다더라고요. 그래서 별 수 없이 전 마스터께서 맡으시긴 했지만 원래 다른 일을 하시던 분이시기도 했고, 아들 내외의 흔적이 함부로 없어지는 걸 싫어하셨어요. 요즘에서야 조금씩 고치고 있는데, 아직 손님들에게 크게 눈에 띠지는 않나 보네요.”

그럼 그 전주인 분은.. ”

유감스럽게도 두어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이에요. 그러고 보니 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사람을 불러드릴까요? ”

아뇨, 괜찮습니다. ”

눈썰미가 좋은 제드로에게서 본능적으로 살짝 경계심을 느낀 라일은 더 이상 이 일행과 말을 섞으면 위험하다 판단해 일단 흐름을 끊었다. 자신이 일한 와중에 이제껏 이 건물과 마스터에 대한 배경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전 주인에게서 들은 아들 내외의 이야기를 꺼내 일단 위기를 넘겼지만, 혹여 잘못하다가는 손님 장사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저들이 눈치 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에서 로비의 대화를 듣고 있을 타리크도 분명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이야, 저런 손님들도 다 있구나. 누가 들으면 내가 이 여관을 뺏은 줄 알겠네. ”

손님들이 방에서 각자의 짐을 푸는 사이, 라일은 잠깐 로비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을 타리크에게 방금 들어온 손님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카운터에는 타리크가 라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헐렁한 베렌 전통 실내복 차림으로 로비에 나온 그는 손님이 서명한 주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베렌으로 돌아온 이후로 머리를 자른 적이 없던 터라 끈으로 묶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많이 자랐다.

괜찮겠어? ”

키득거리는 라일과는 달리, 타리크는 긴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표정이 상당히 심각했다. 이스리안에서 보낸 위장한 추적자가 아닐까 사뭇 경계하는 눈치였다.

. ...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쪽에서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저 사람들이야 내일이면 나갈 거고, 빈방이 있는데 신분이 확실한 손님을 안 받으면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할 테니까. 이분들도 보통 눈썰미가 아니라서 함부로 움직였다간 분명 우리가 뭔가 있구나 하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그냥 평소대로 하자고. 내일 아침이면 오랜만에 시끌벅적하겠네. , 혹시 모르니까, 내일 아침에 시에가 오면 조금 무서운 손님들 왔다고 얘기는 해야겠다. ”

재밌어 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은 조심해. ”

알아. ”

촛대를 로비 카운터에 올려놓은 라일은 한숨을 쉬는 타리크를 향해 손을 뻗어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살짝 걷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은 라일은 그대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한 혹은 잔소리를 얼버무리기 위한 라일의 짓궂은 키스였다.

그나저나 여섯 사람이면... 밑준비를 좀 해야겠는데. 10인분을 처음부터 준비하려면 정신없으니까. ”

내일 아침은 뭔데? ”

베렌식 양파 수프하고, 호밀 빵에 훈제 햄 조금 하고 감자 샐러드. 다른 건 괜찮은데 빵이 조금 모자랄 것 같아. 반죽을 좀 만들어야겠어. ”

그거 내가 좋아하는 거 아니야? ”

글쎄다. ”

라일의 가벼운 장난이 싫지는 않았던 듯 한결 표정이 펴진 타리크는 들고 있던 주문서를 라일에게 건넸다.

가는 김에 손님들에게 뭐 좀 먹을 거냐고 물어봐줄래? 이 시간에 짐 들고 오느라 배고프다는 사람 분명 있을 테니까. ”

알았어. ”

식당으로 들어가는 타리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라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그가 자신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지나쳐 혹여 손님들을 이스리안 제국의 추적자로 의심해 해코지하는 일이 일어날까 오히려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 기분이 기우이길 바라며, 라일은 모포를 준비하기 위해 로비의 계단을 다시 올랐다.

은은하게 울리는 괘종시계가 깊어지는 밤을 알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