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erka 2020. 10. 20. 23:23

두 번 다시는 못해, 그런 거. 안 해, 안 해, 안할 거야. ”

얼굴을 찌푸린 채로 혀까지 빼 물며 자리로 다가온 티샤는 리스의 잔에 맥주를 부었다. 보기만 해도 컵 안에 맺힌 공기방울만큼이나 대화에는 청량감이 피어올랐다. 평소에 관대하고 믿음직했던 사촌 언니가 일에 있어서는 티샤를 철저하고도 짠 내나게 교육시키는 걸 옆에서 목도했기에 리스는 티샤가 겪는 감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좋아, 그 자세야. 그렇게 언니한테 개기는거야. ”

오늘밤에 찾아오면 니가 그랬다고 다 일러바칠 건데. ”

한마디도 지지 않는 실없는 악담을 주고받았고, 재미있는지 티샤와 리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리스가 아는 사촌언니는 그랬다. 티샤의 사수이자 선배, 그리고 누구보다도 티샤에게 관심이 많았던 사람. 내심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었다고 믿었기에 티샤로부터 받는 원망도 감수했고, 설령 티샤가 포기한다 하더라도 다가가서 자기가 잘못했다 사과하고 안아줄 사람. 티샤도 그런 언니를 무척 잘 따랐고, 무척 존경하면서도 좋아한다 했었다. 그게 벌써 시간이 한참 지났구나, 그랬는데 지금은 그 사람의 사진 한 장 앞에 두고 웃고 떠든다. 누구보다 슬퍼한 티샤는 씩씩하게 그 슬픔에서 벗어났고, 언니에게 사로잡히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드르륵.

그때, 스쳐 지나가는 노크 소리가 들렸고, 닫혀있던 미닫이문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너무 늦었나? ”

동시에, 조금 낮게 깔린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지만 그 음역에서 낼 수 있는 가장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 ”

어디 갔다 왔어? 연가 냈다면서. ”

바깥이 제법 어둑어둑한 상황이었지만, 방금 이곳에 도착한 아저씨 벤퍼스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실내로 들어왔다. 선글라스로 가리고는 있었다지만 시력을 상실한 오른쪽 눈과 그 주변의 큰 흉터는 보는 사람마다 수군거릴 정도로 제법 컸다.

형님네 좀 다녀오느라. 혼자야? ”

. 남편 오후에 출장 갔는데, 빨리 온다고 해도 자정 가까이 될 거 같아서. ”

그래... 나중에 술 좀 먹여야겠네. ”

그러니까 우리 남편이 장인어른을 그렇게 무서워하지, 덩치도 큰 데다 얼굴엔 길다란 흉터까지 떡 하니 있어서 가뜩이나 인상 험상궂은데 그런 말까지 하냐고 리스가 툴툴거렸다. 벤퍼스 아저씨라면 분명 시집간 딸의 아쉬움을 대신해 지금 당장 안 올 거냐며 금방이라도 사위 뒷덜미 잡으러 나갈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티샤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적당히 드세요, 의사로써 과도한 음주는 안 돼요. 솔직히 몸 상태 보면 당장 은퇴하셔도 할 말 없다고요. 무알콜 맥주라면 몰라도. ”

생명의 은인이신 티샤 선생님. 뭐 그래도, 선생 덕에 이만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어딥니까. 아직은 현역이야. ”

자꾸 그러시면 리스 울어요, 아저씨. ”

그러니까. 그리고 티샤야, 난 안 울어. 오히려 뒷마당에 묶어 놓을 거면 모를까. ”

“ ..... ”

할 말을 잃은 티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옆에 있던 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벤퍼스를 바라보았다. 죽은 사람 사진 앞에서, 자기가 크게 다쳤을 때의 일을 떠올리는 건 다시 생각해봐도 좋은 장면이 아니었다. 자기 아버지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온 리스 부부 하며, 그날따라 당직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술실에 들어갔던 티샤, 상황은 긴박했고 상흔은 컸었다. 그 때를 생각하니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만든 것 같아 벤퍼스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색한 마음에 벤퍼스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