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예비 시스터 과정에 들어와 처음에 한 조로 맺어진 사람이 다름 아닌 교회 내에서도 어리숙한 괴짜로 알려진 쿠스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버지가 인정할 만큼 훌륭한 시스터가 되고 싶었던 시아키는 속으로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기본적으로 21조로 움직이는 만큼 쿠스케의 잘못은 시아키의 고과성적에도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아키는 조를 바꿔달라며 바로 교무부에 이의를 제기했고, 당연히 교무부는 이 치기 어린 시스터의 억지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땐 그랬었지... ’

그렇게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새벽 연습을 마친 시아키는 프람과 함께 지금 막 해가 비추기 시작한 길을 따라 사무동에 있는 자신들의 디바이스 공방'쿠키오븐'으로 향했다.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그때의 자신은 정말로 어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적으로 시스터 과정 내에서도 우등생이었던 자신에 비해 쿠스케는 디바이스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틈만 나면 쿠스케의 어리숙함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거기에 화를 내고 싸웠던 게 몇 번이었나 모른다. 그렇지만 경쟁을 별로 내키지 않아했던 쿠스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디바이스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디바이스 마이스터 1급 자격증을 따거나, 중요한 평가전 전에는 따로 개인연습을 하는 등 무척 애를 썼었다. 시스터 과정에서 기수 최초로 래트리버 종의 강아지 프람을 수호수로서 계약하는데 성공했고, 총괄평가를 걱정하면서도 의외로 파트너인 자신의 성적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렇게 노력한 쿠스케에게 노력했습니다, 열심히 했다는 변명이 평가 점수에 1점이라도 반영될 것 같냐.’는 말을 서슴없이 했던 게 지난날의 시아키였다. 남들보다 빨리 기사가 되고 싶어 했고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초조함에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때의 자신을 마주한다면 한 대 쥐어박으며 그러니까 성적만 좋았을 뿐이지 네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거야.’ 라 했을 거라고 - 시아키는 생각했다.

시에? ”

나란히 옆에서 걷던 프람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시아키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수호수로서 계약한 프람은 그때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붙임성 좋은 성격 그대로 쿠스케와 시아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으응, 아무것도. 쿠스케는 자고 있겠지? ”

지금은 일어나 있.....어라? 누구지? ”

프람의 대답에 시아키는 쿠스케의 안에 있는 또 다른 이를 떠올렸다. 폐기처분해도 상관없을 전투기인으로서의 의식이자 데이터인 코드 아일렌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시아키를 막아섰던 쿠스케의 또 다른 인격이었다. 왼쪽 눈동자에 불길했던 붉은 빛을 한가득 번뜩이며, 이제까지의 쿠스케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동작으로 당시에 기사 후보생이었던 자신을 궁지로 몰아붙였고 시아키는 처음으로 쿠스케에게 이기지 못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데 주저함이 없고 어떤 임무든 수행하는 데 망설임 없었지만 쿠스케가 잘 제어하는 덕분인 듯 그는 쿠스케가 잠들거나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일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고,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쿠스케가 실은 교회 내에서 운용하려던 비밀 전투기인 계획의 프로토 타입이자 프로그램인 코드 아일렌을 지닌 전투기인이었다는 것, 모두를 위한 일이라며 그 계획을 주도한 사람이 주교이자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것, 그 아버지로부터 끝내 버림받은 것, 그리고 명령이 있다면 자신이 인정한 선량한 사람마저 죽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시아키는 방황했고, 모두가 선망하는 베르카 기사가 되었지만 시스터로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 당시의 아일렌이 시아키의 앞날을 결정지어버린 셈이었고, 쿠스케는 항상 그 점을 미안해했다.

프람! ”

!

그때 어떤 기척을 느낀 시아키는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트라이 실드를 발동한 왼손을 뻗어 날아오는 강한 근접공격을 받아냈다. 맞부딪친 주황색과 보라색의 베르카식 마법 사이에서 불꽃이 세게 튀었다. 거기서 조금 더 힘을 주어 시아키는 그대로 상대의 공격을 튕겨냈다. 깜짝 놀란 프람이 옆으로 펄떡 뛰어 물러나 컹컹 짖었다.

아침부터 너무 요란한 거 아니야? 코드 아일렌. ”

공격을 받아치느라 얼얼한 손목을 털며, 건너편에서 태세를 가다듬는 상대를 향해 시아키는 차분하게 쏘아붙였다.

생각보다 좋은 대처였다. 기사 시아키. ”

쿠스케의 탈을 쓰고 있는 그는 들고 있던 검을 고쳐 쥐었다.

그 쯤 하지? 가뜩이나 우린 교회의 특별관리 대상인데 여기서 더 일을 벌이면 나를 물 먹이는 건 그렇다 쳐도 쿠스케가 좋아하는 언니오빠들을 무척 곤란하게 할 거야. 그렇게 아쉬워하지 마. 좋던 싫던, 우린 언젠가 승부를 낼 테고 넌 내 손에 질 테니까. ”

네가 날 이길 수는 없다. 지금은 쿠스케의 뜻에 따를 거지만. ”

잘 알고 있네. 그리고 쿠스케를 잠식하면 가만 안 둬. ”

그건 권한이 없어 이쪽에서도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리고 이거. 조정 종료다. 마지막 테스트도 완벽하다. ”

내 무기로 날 공격하다니, 굉장한 악취미네. ”

안경 없는 무표정한 표정의 아일렌은 더 이상 디바이스를 휘두를 흥이 나지 않은 듯 들고 있던 검 디바이스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곧바로 카드 형태로 변한 디바이스를 그대로 시아키에게 건네주었다.

변경점은? ”

새 시스템에 맞는 프로그래밍 코드의 완전 재작성에 의한 디바이스의 과부하 및 오작동 해결, 버그 A-31.82k의 수... ”

잠깐, 지금 재작성이라고... ”

지극히 기계적인 말투인 그의 대답이었지만, 그 내용은 갑작스러운 아일렌의 공격에조차 동요하지 않던 시아키를 당황시켰다.

자세한 설명은 쿠스케에게 듣도록. 난 디바이스 마이스터가 아니다. ”

그래, 그러시겠지. ”

처음부터 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가 물거품이 된 순간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시아키는 한편으로 그 안에 놀란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사실 재구축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시아키는 자신도 모르게 미쳤냐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새 시스템이 장착된 장비를 쿠스케에게 맡긴 것은 고작 이틀 전이었고, 자신이 아는 한 최소한의 기능을 위한 디바이스 내장 프로그램만 해도 최소 3천 줄, 사용자에 맞는 환경 설정까지 포함하면 족히 5천 줄이 넘어가는 것이 디바이스의 소포트웨어 코드였다. 아일렌의 말대로라면 오늘 있을 중요한 모의전에 나설 쿠스케는 이틀 지난 내내 자신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디바이스 내장 프로그램을 전부 새로 작성한 후, 지금 이 순간까지 시아키 자신에 맞는 옵션까지 전부 조정하고 테스트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일정 중에 모의전이 있었던 것 같다. ”

“ 0920분에 제3 훈련장에서 대항군 및 훈련 간부조 집합, 0920분부터 11시까지 준비운동 및 장비 점검, 작전회의가 있고 점심식사 후에 모의전이야. 필요하면 아침은 갖다 줄 테니까 너도 지금부터 좀 쉬어. 평소보다 반응 속도가 0.357 늦었어. ”

“ ...참고하겠다. ”

아일렌은 눈을 깜빡였다.

짝짝짝짝.

멋진데. 아가씨들. 아침부터 좋은 구경도 시켜주고. ”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소리에 시아키와 아일렌, 프람의 시선이 근처 격납고 지붕으로 향했다. 반 묶음을 한 제법 긴 검은색의 머리, 역시 같은 검은색의 트렌치코트, 흰색의 셔츠는 가슴을 가릴 정도만 잠겨있고 나머진 자유롭게 나풀거렸다. 그동안의 숱한 격전과 함께 한 흔적이 깃들어있는 청바지 아래로 앞코가 닳은 낡은 부츠를 신은 여자 한 명이 다리를 꼬고 앉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여- 안녕들 하신가. ”

박수를 마친 여자는 2층 높이의 건물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내리고는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녕, 누나.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리브 님. ”

옆에 있던 프람이 리브에게 다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자 리브는 반가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나가다가 큰 소리가 들렸거든. 사이좋은 두 시스터가 아침부터 싸우는데 그냥 지나갈 수가 있어야지. 말리러 왔어. 하하하하. ”

그런 거라면 마침 잘 오셨어요. ”

시아키는 피식 웃으며 화답했다.

프람 말고는 우리 둘 다 리브 님이 와있는 걸 눈치 못 챘어. ’

그렇지만 속으로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 시아키였다. 자신이 베르카 기사로 인증 받았다고는 하나,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것을 리브를 볼 때마다 실감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쿠스케와 시아키가 그라나간 외곽에 위치했던 기동6과에서 파견 근무하던 시절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알고 지낸 것은 시아키와 쿠스케가 교회를 나와 뒷골목을 무대로 활약할 적부터였다. 실력도 비슷하지만 이쪽 방면에는 리브가 선배였고, 같이 일하거나 관련해서 배운 것이 많았기에 시아키는 리브에 대해 항상 예의를 갖추곤 했다.

그래....그랬단 말이지? ”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손가락으로 휘휘 돌리며 다가오던 리브는 권총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걸리는 순간 그대로 힘을 주어 쥐고는 아일렌의 이마를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아일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모처럼 코드 아일렌이 나왔는데, 아쉽네. 여기가 교회가 아니라면 바로 방아쇠를 당겼을 텐데. 넌 살기등등한 게 디바이스 바보에 사람 좋아서 물러터진 순둥이 쿠스케하고는 전혀 달라. 누구 피가 튀겨도 상관없이 오로지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지. 사람 목숨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너 같은 녀석은 솔직히 말해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야. ”

쿠스케만 지킬 수 있다면 너와는 상관없다. ”

그러니까 서로 발목이나 잡지 말자고. ”

그쪽이야말로 악성코드 같은 짓은 하지 않기 바란다. ”

하아..... 시에, 얘 뭐래는 거냐? ”

무서운 얼굴로 아일렌을 노려보던 리브는 말이 끝나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표정을 풀고는 그대로 총을 거두어 허리에 찼다.
놔둬요, 그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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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rier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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