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가 조금 넘자 슬슬 배가 고파졌다.
" 벌써.... "
티샤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간단한 주변 정돈을 하고, 1층 부엌에 내려가 식빵 한 봉지와 물 한 통을 들고 연구실로 올라온 이후 내내 문서작성에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티샤의 머리가 자리에 앉은 동안 내내 연성한 결과물은 오늘 중으로 완성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섯 개의 모니터는 치열했던 작업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듯, 각각 자신의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복잡한 언어가 하얀 백지를 가로지르고, 관련 수치가 나란히 적혀있거나, 사람의 부러진 뼈가 찍힌 X레이 사진이 찍혀있거나, 다른 논문을 펼쳐놓거나, 자기가 앞서 작성해놓았던 문서를 짜깁기하기 위해 펼쳐놓거나 낙서를 해놓는 식이었다.
" ..... "
더 이상의 작업은 무리였다.
그렇게 생각한 티샤는 데이터가 날아가지 않도록 저장 버튼을 누른 후 모니터를 전부 껐다. 그래, 일단 밥을 먹고 생각을 할까,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었지, 어제 먹다 남은....아니, 불을 올려 따뜻하게 새로 굽거나 끓이는 음식이 좋을것이다. 하루종일 빵가루 흩날리게 먹은 빡빡한 식빵이 생각나지 않도록 따뜻한 수프 요리를 하자, 냉장고에 양파가 남아있었지, 그렇다면 양파와 당근 같은 채소를 달달하게 볶은 다음 육수를 넣어 양파수프를 만들도록 할까. 빵은 곁들이지 않고, 순수하게 맑은 수프를 한입 가득 베어물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거야.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도 그런 식으로 결정이 빠를테면 좋... 아냐, 지금 여기서 논문 고민을 왜 하는거지.
이런 습관 때문에 티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정부를 고용하라는 권유를 자주받았다. 아니면 결혼을 해서, 주변이 안정적이면 괜찮을거라는 조언 아닌 조언도 듣곤 했다. 티샤 정도의 지위, 재산이라면 자신을 도와줄 이를 얼마든지 만날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한다. 그럴때마다 티샤는 씁쓸하게 웃곤 했다. 오히려 옆에서 사람이 자기 주변을 왔다갔다 한다면 그게 더 정신사나울것만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나쁘지는 않....지 않나?
젠장.
잠시 삐삑 하는 소리가 들려 모니터를 열었다. 별로 받고싶지 않은 메시지였다. 전 애인의 구질구질함에는 왜이렇게 브레이크가 없는 거지, 분명 그날 하루 만나고선 다시 만날 일은 없을거라고 했었는데, 지난번 뉴스에 나왔던 티샤를 봤다면서 업무용으로 쓰는 메일에 들어와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 사람은 같은 '세계'에서는 봤을지언정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더 상대해줄 가치를 느끼지 못한 티샤는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띠었다. 빨간색 동그라미와 함께'벤퍼스 대령'이라고 표시가 되어있었다. 업무 중에 크게 다쳐서 자신앞으로 실려온 관리국의 유능한 사람이 1년에 한번 자신과 치료 경과 관련으로 정기 상담을 하기 위해 찾아온다고 하는 날이었다. 그게 바로 내일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게 벌써 4년 전의 일이라니, 세월 너무 빠르단 말이야. 안 그래요, 클레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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